할아버지와 핸드폰

2008/10/11 15:07

떡실신이 된 육체를 이끌고, 종로3가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털썩 하고 앉아있는데, 옆에 앉은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핸드폰에 번호 하나만 추가해달라고 하셨다.

'아.. 어렵지 않지.'하는 마음으로 덥썩 폰을 건네받은 것은 발단이었다.

간단히 번호를 추가하고, 요구하신대로 단축번호를 지정해드리고, 폰을 건네드리니, 몇개만 더 추가해달라고 하신다. 어르신들에게 쉽게 호감을 받을 수 있는 표정('배시시' 웃으면 된다)으로 추가해드리려는데, 차라리 자신이 할테니 추가하는 방법을 알려달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 고기 잡는 법을 알고싶어하는 할아버지로다. 멋있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종이에 하나씩 단계별로 순서를 적어가면서, 15분동안 방법을 알려드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직접 해볼테니 나보고 봐달라고 하셨다. 역시나, 조금 헤메이셨지만, 꽤 능숙(?)하게 조작하셨다. 중간중간 다른 버튼을 누르려하는 것을 바로잡아 드렸다. 할아버지는 성공적으로 번호를 추가하신 후에, 고맙다고 하셨다. 단축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놓고 종료를 누르기를 수십차례, 상대방에게 무슨일이냐고 전화가 온 해프닝은 논외로 치자.

난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고, '그래. 아직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야.'라고 생각한 것은 물론, 나의 착각이었다.

이걸 알려드리는 동안, 지하철이 3~4대 가량 지나갔다. 그래 뭐, 몇대 쯤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찰나, 전화번호를 삭제하는 방법도 알려달라 하신다.

'금방 가겠다고 했던 친구에게 연락을 해야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과, '과연 이걸 알려드리면 끝날까?'하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전화번호를 삭제하는 방법을 알려드렸다.

지금까지, 약.. 40분이 흘렀다. 단순히, 전화번호 추가/삭제를 알려드리고, 직접 해보시는 모습을 보는데 말이다. 표정관리가 점점 힘들었지만, 최대한 웃기 위해,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할아버지는 시간을 많이 뺐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지하철이 전 정거장에 와 있었다.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다가 말씀하시길..

"그런데, 사진 전송은..."

아아... 마침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할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대충 얼버무리고, 가봐야한다는 말을 남기며 도망쳤다.

본 글은 내 도덕성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연장자라는 컨셉으로) 상대방을 붙잡는 스킬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전화번호 추가/삭제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하는걸까? 내가 적어드린 전화번호 추가 매뉴얼도 무려 13줄이었다. 전화번호 한개를 추가하기 위해 눌러야 할 버튼이 최소 13개라는 말이다. (숫자를 누르는 과정을 빼더라도.)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는 그 간단한 아날로그적 방식이, 핸드폰에서는 왜 이렇게 복잡해야만 하는걸까?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걸까?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메뉴 구성들이지만, 이게 정말로 당연한걸까? 점점 노인 인구가 세계적으로 늘어나는데, 이들을 위해 인터페이스를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신기술에 대해 비교적 익숙한 지금의 중년층이 노인으로 될테니, 개선할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는걸까?). 아이들은 쉽게 새로운 것을 익힌다. 옛날에는 익숙하지 않던 '컴퓨터 게임'이라는 문화도, 그 어린아이들이었던 세대들이 자라남에 따라서 점점 연령층이 올라가듯이, 이런 인터페이스의 복잡도도 어린 세대들이 점점 자라남에 있어서 해결이 되는 단순한 문제일까? 그러면, 지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한 시장은 포기해야만 하는걸까? 그분들에게 이런 복잡한 방식들을 강요해야 하는걸까? 정말로, 사용자가 배워야 하는 부분인가? 사용자의 문제인가? 혹은, 개발자의 문제인가.

할아버지를 등지고 지하철에 타면서,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래.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

진정,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매뉴얼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 인터페이스 구성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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